“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한복음 10:29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말씀 앞에 서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크신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사랑하시고, 마침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이러한 구원의 본질을 한 구절에 압축해서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이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 3:16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29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가리켜 “만유보다 크시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크신 하나님께서 누구를 붙들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유보다 크신 분의 손에 하나님의 백성이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연약함을 먼저 바라봅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과연 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출발점을 나에게 두면 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16에서 특별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따라서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를 주신 사건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시는 사랑입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며, 받을 자격이 있어서 주시는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가페 사랑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사랑에는 조건이 붙기 쉽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며, 받을 만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께 먼저 무엇을 드린 결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목적은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목적도 요한복음 3:16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감정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습니다.
죄와 멸망의 자리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 생각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무엇을 주셨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셨고, 믿는 자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요한복음 3:16의 중심에는 이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 독생자를 주심 → 믿음 → 멸망에서 구원 → 영생
이것이 복음의 놀라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에 관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이 주어졌지만,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돈이나 공로로 갚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많이 한다고 해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값을 지불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이 내가 받은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만 간직하라고 주신 생명의 소식이 아닙니다.
나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그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로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이러한 복음의 사명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로마서 1:1에서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에게 복음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부름받은 이유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16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마땅한 사명으로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내가 남보다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빚진 사람의 자세입니다.
받은 사랑은 결국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안다는 것은 단어의 뜻을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삶으로 응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면 나는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면 그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영생을 얻었다면 그 복음을 나 혼자만 간직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보다 주 예수의 이름을 귀하게 여겼고, 예루살렘에서 결박뿐 아니라 죽는 것까지 각오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과 똑같은 삶의 형태로 부름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을 받은 사람에게 복음은 삶의 주변부에 머물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다시 요한복음 10:29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를 자신의 손에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묵상할수록 우리의 시선은 결국 두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감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허락되는 동안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받은 사랑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멸망에서 생명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받은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것.
그것이 헤아릴 수 없는 아가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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